꼭 보세요?

작성자
이 장우
작성일
2016-03-07 10:33
조회
1679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몰표를 던진
50대 이상 유권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딸 박근혜 대통령을 통해
‘아버지 세대’가 이룬 경제 기적의 역사라는
과거를 보는 동시에 새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런 한편에서는 최근 법원의 긴급조치 위헌 판결 등
독재 시대
민주화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관통해 왔던 상반된 가치와 관점들이
한꺼번에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좌냐 우냐,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념 갈등과 함께
성장이냐 복지냐, 안보냐 경제냐 하는 논란에
세대 간의 갈등까지 있다.
많은 사람이 사회통합을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화합만이 ‘통일시대’라는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는 말을 남겼다.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미래 역사로 전진하려면
과거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박정희 시대여야 할 것이다.

삼성이 소니를 이기고
현대자동차가 세계를 휩쓸고 문화 스포츠 한류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이고,
우리 내부에 있는 갈등은 무엇이고,
우리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정리할 때가 됐다.
우리는 거기서 얻는 교훈으로 미래로 가는 엔진의 힘을
재충전해야 한다.

전쟁 이후 잿더미라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려면 초심(初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동아일보는 창간 93주년 기획을 통해
이제 막 대통령이 되었던
‘1964년 박정희’의 이야기를 싣기로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음’을 보았던 사람으로
1964년 말
서독 국빈 방문에 통역관으로 따라간 백영훈
당시 중앙대 교수
(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사진)가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그는
가난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젊은 박정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 1000m의 갱도에서 목숨 바쳐 일했던 파독 광부들과
동양에서 온 천사라는
말을 들으며 헌신했던 파독 간호사들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초석이라고 말한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다양한 기획물로 이념의 잣대가 아닌
역사의 주역 국민의 관점으로
현대사를 정리할 것이다.
‘젊은 박정희’의 모습은 그 첫 회 격이다.

▼ 차관사절단 “돈 못빌리면 서독서 죽겠다” ▼
백영훈씨 증언
‘50년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 -
박정희 통역관
한국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서독 상업차관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백영훈 원장
.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권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 박대당한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 금융기관들도 야박하게 퇴짜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
‘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서독 경제는 1950년부터
매년 연평균 8%대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의 모습을 보며
박정희는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라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경제학 박사 1호
백영훈 씨(83·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가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한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관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
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결국
매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시 백 원장의 말이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독일 최고훈장인
특등십자대공로훈장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
한국 정부도 서독 대통령 내외에게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
“못사는 나라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백 원장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과장은 다음 날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고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대 1의 경쟁률이었다.
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했다.
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1963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가짜 광산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 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
.
우여곡절 끝에 차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백 원장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한 뒤 다시 중앙대 교수로 복직한다.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년 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라인강 기적 설계자
“고속道 깔고 車-제철-정유 육성”
조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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